10분의 1의 솔직한 이야기
1. SNS
현 시대에 저 같은 사람에게 SNS는 저를 알리는 하나의 창구입니다. 예술한답시고 작품만 만들어 사진을 파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이미 부를 축적한 80년대·90년대 사진가들이 아니라면 디지털 시대에 사진 판매나 전시회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사진은 가벼워졌고 흔해빠졌으며, 편집 방식은 지나치게 다양해졌습니다. 적어도 그림이 아닌 이상, 사진은 작품으로서 판매되기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그들 또한 이미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명예욕을 채우는 데 가까웠겠죠.
게다가 잡지나 연예인을 상대로 화보를 파는 패션 사진이나 잡지 사진 쪽은 연예계만큼이나 더럽습니다. 대다수는 학연, 지연, 인연으로 굴러가는 구조 안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이고, 이미 판을 점거해 놓은 상태입니다. 물론 저 역시 그 인맥 안에서 그쪽 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압니다. 여기서만큼은 ‘노력’이라는 단어를 아예 배제하고 싶습니다. 노력은 개새끼나 도둑놈들도 합니다. 그건 미덕이 아니라, 조건입니다.
결국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사진가들은 매번 새로운 의뢰인들에게서 흥미를 끌어 촬영 의뢰를 받아야 먹고살 수 있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류의 결과물이 너무 많고, 한 끗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얼굴과 몸매, 피부만 잘 보정되면 일류 사진가라고 여기는 무지한 대중이 대다수라는 점은, 그 어떤 장점도 상쇄시켜 버립니다.
그나마 저는 적어도 이 분야에서만큼은 독보적이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사람을 본 적도 없었고, 신념과 열정, 가치관과 생명력, 감각과 심리적 요소까지 포함해 축적된 역사와 결과물, 그리고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보적이면서 비사교적이고 직설적인 면이 있는 제게 SNS는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게시하고 게재하고 올릴수록, 그것은 불특정 다수에게는 구경거리가 되고, 신념도 근본도 없는 사진가들에게는 창작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어떤 일반인들에게는 “저 사람에게 사진을 찍을 용기도, 돈도 없지만 보는 건 흥미롭네. 공짜니까”였고, 전문가나 예술가 흉내를 내는 사진가들에게는 “저 새끼가 떠들어대는 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틀린 말은 없으니 사진이든 글이든 베껴먹기엔 좋겠네” 같은 시선이었죠.
아무튼 길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구시대가 아닌 디지털 시대에, 어디 놀러 가서 뭘 먹었는지 자랑하고 잘나가는 장소에서 남부러움 살 용도로 SNS질을 할 게 아니라면, 저 같은 사람에게 SNS는 곧 수입의 전부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찍는 사진들은 인지도와 신뢰가 기반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예쁜 사람들을 데려다 예쁘게 찍고 감성을 부르짖는, 초등학생도 할 법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혹은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벗기고 퇴폐미니 누드니 바디니 떠드는 아마추어들에게 현혹된 무지한 대중을 포함해, 진짜로 본질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이 보더라도 제 사진은 흔히들 말하는 야한 사진, 에로틱, 포르노, 섹슈얼 중 무엇으로 불리든 독보적이고 변태적이며 흔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저만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분명한 수요가 있었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재적 수요가 존재했었습니다.
그 잠재적 수요는 가만히 있는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여러 세월 동안 풍파에 바위가 깎이듯, 한없이 앞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스스로 외길을 닦아가는 고난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저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 제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기구한 역사와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 그리고 시간들이 쌓여 많이 알려져야 했었습니다. 그게 곧 인지도였고, 방구석에서 혼자 발버둥 쳐봐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2. 잃어버린 것들
노력했습니다. 많이 했습니다. 한 푼도 없이 길바닥에서, 돈이 없어도 채울 수 있는 것들로 저를 가득 채워 나갔습니다. 그중 하나가 SNS였겠죠. 그렇게 10년을 버티니 스튜디오도 생기고, 따르는 사람도 많아지더군요. 그렇게 인지도를 쌓았었습니다. 얕은 관심과 거품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길바닥 출신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품 같은 인지도라도 신뢰가 있어야 쌓입니다. 제가 뿌려 놓은 흔적과 기록들이, 그걸 증빙하고 있었죠.
저는 평생을 저를 증명하는 일로 살아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목받는 삶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증명해 내야만 했습니다. 제가 내뱉은 거친 말과 더 거친 문장, 동종 업계를 비난하면서도 떳떳할 수 있었던 텍스트 한 줄 한 줄, 그리고 그것들을 증명하는 결과물. 그 모든 것이 기록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신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인지도이자 신뢰라고 부르는 거겠죠. 적어도 저 같은 길거리 출신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13년간 일궈 왔던 흔적들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물론 원본 자료들은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거품이었을지라도 웹상에 흩어져 있던 불특정 다수와 잠재적 의뢰인들, 혹은 팬을 자처하며 얕은 관심으로 뭐라도 떨어지는 콩고물을 줍던 사람들, 그나마 빈자리를 채우고 있던 그것들까지 함께 사라졌습니다.
꽤 잘해 왔습니다. 잘해 왔었고, 잘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리에서 시작해 13년 동안 타고난 감각과 흔치 않은 경험을 토대로, 나름의 인지도와 함께 돈도 꽤 만졌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음지에서만큼은, 제가 다크 나이트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SNS가 뭐라고, 남들은 심심해서 취미나 놀이거리로 여기는 그 SNS 하나가 사라지고 나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더군요. 아니, 정확하게는 수입이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드러난 얕은 유명세와 거품 가득했던 현실은, 실로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미칠 듯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뒤로 두 번을 더 이를 악물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 가며 13년의 시간을 되돌리려 발버둥을 쳤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12월,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SNS마저 영구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rabidstudio, rabidstudio_official, rabidstudio.official까지. 2025년의 끝자락, 쉬려고 떠났던 미국에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운영하던 계정마저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rabidstudio라는 이름으로 어떤 아이디를 만들어도 즉시 영구 삭제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정말 갖가지 것들을 남몰래 만들어 보았지만, 게시를 하기 전부터 비활성화되더군요. 어쨌든 더 이상 제가 자랑처럼 내밀던 이름을 달고 무언가를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겁니다. 이 조치가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없고, 하루하루가 급한 생계형인 저에게는 기다릴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지금 제가 사라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그 스튜디오 이름인데, 십수 년간 그 이름을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과 돈과 시간을 쏟아 왔습니다. 제대로 스튜디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은 단 1%의 끈이자 역사였으니까요.
사람들은 자꾸 이유를 묻습니다. 중요한 건, 그걸 묻는 사람도 그것에 답해야 하는 저 역시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지인들은 지레짐작으로 이런 방향, 저런 방향을 해답인 양 제시하지만, 그것 또한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들의 추측성 편견과 멍청한 방법론일 뿐이죠. 이래서 그랬을 거다, 저래서 그랬을 거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그 값싼 위로와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 봐라, 저런 식으로 해 봐라 같은 말들까지. 제가 걸어온 길과 살아온 길의 무게를 타인의 삶과 굳이 견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꾸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평범하지 않았고, 평범하지 않았기에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감각이든 능력이든, 그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운빨이거나, 아니면 남과 다른 개성, 방향, 방법. 딱 그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운빨이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이건 오로지 저라는 사람이 십수 년 동안 쌓아 온 결과였겠죠. 그리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 실패라는 표본으로 남게 된 겁니다.
제 오랜 친구나 지인, 혹은 얕은 관계의 클라이언트들. 제가 제가 아니었다면, 과연 저를 알게 될 계기나 기회가 있었을까요. 대부분은 저의 독특한 방식과 사진, 글, 방향과 진실성, 그리고 독보적인 직설 때문에 팬이 되었거나 클라이언트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저는 한 발 한 발, 제 방식대로, 제 모습 그대로 저를 쌓아 올려 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버리라는 가벼운 조언들이 참 어처구니없더군요. 물론 당장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습니까. 하지만 인지도라는 게 단시간에 그렇게 쉽게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삽시간에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일례로 2024년 12월, rabidstudio 계정이 삭제되고 막막했을 때 단기간에 인지도를 쌓아야 했기에 여성을 구인했었습니다. 모델 지망생이든, 인플루언서를 희망하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일단 제가 프로듀싱할 여성이라는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걸 통해 제 스튜디오나 제 직업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 계획이었죠. 당장 다음 달 집세를 메워야 했으니까요. 그 계획에 참여할 사람에게 명분이 필요하다면, 뭐든 만들어서라도 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끝은 제 잦은 핍박과 심한 지적 때문에 그 친구가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좋지 않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겠죠. 시작점부터가 너무 비즈니스적이었으니까요. 다만 저는 약속했던 시점보다 3개월을 앞당겨, 단 3개월 만에 팔로워 1만 1천 명을 만들고 게시물 평균 조회수 5만, 최고 12만까지 찍히는 계정을 증명해 보였었습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아바타를 다루듯 모든 것을 조작했었죠. 그렇게 단기간에 인지도를 쌓는 방법을, 제가 모르는 건 아니었던 겁니다.
제 직업을 떠나 SNS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만큼은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습니다. 저는 이 분야에서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제 기준에서 평범한 방향과 행동, 방법으로 운영해 온 사람들은 쉽게 겪지 못할 일들을 더 많이 경험했고, 그것들이 축적되어 있다는 뜻이죠. 자랑질로 SNS를 하는 사람, 평범한 자영업으로 SNS를 하는 사람, 컨설팅이라며 SNS로 마케팅을 하는 사람, 혹은 저와 비슷한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별문제 없이 운영되고 있는 사람들까지. 나아가 파란 딱지를 달아야 상담이 가능한 고객센터 직원들보다도, 제가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내려진 결론은 하나입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 아무도 모른다는 것.
25년 12월, 마지막 계정이 사라지기 전까지 정말 많은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잃어버린 잠재적 의뢰인들과 흔적을 되돌리기 위해 쫄쫄 굶어 가며 광고에만 몇백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또다시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세 번째 겪는 일이다 보니, 정말 너무 지쳐 버렸습니다.
화려했던 20대를 지나 열정이 솟구쳤던 30대를 보내고, 불혹에 접어든 40대에 겪는 여러 번의 실패와 패배감은 가만히 벽을 바라보고 있다가도 눈물이 터지게 만들더군요. 그나마 그 시절에는 의지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잘 따르던 동료와 후배, 동생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우상을 보듯 똥꼬까지 핥아 줄 것 같던 이들마저 이제는 머리가 커져 제 머리 위에 올라서 있더군요.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이겁니다. 덩치가 클 때 내뱉던 외침에는 힘이 실려 있었는데, 왜소한 몸이 되고 나니 그 외침이 발악처럼 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조금이라도 올라섰을 때, 그 기간 동안 더 위로 치고 올라갔더라면 지금의 실패가 발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애매한 인지도와 음지에서의 노출만 남았던 저는, 근본도 없는 이들에게 단물만 뺏긴 채 말라비틀어져 이름도 없는 전장 속 패잔병으로 남아 버렸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뼈대도, 근본도, 신념도 없는 그들이 마치 원래 그랬다는 듯 부서진 제 발목을 밟고 올라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놈” 취급을 한다는 것. 그게 평생을 증명하며 살아온 제 자존심을 끝없이 피폐하게 만드는 것 같아 참 견디기 어렵습니다.
한낱 SNS 따위로 이 정도까지 삶이 파괴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하필 전 세계에서 SNS질을 가장 많이 하고, 오로지 그것에만 목매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가장 얕은 지식으로 가장 유세 떨기 좋은 곳, 웹상에서 전문가에 빙의한 사람들이 난무하는 유일한 한국에서 이런 직업을 가진 한국인이라는 사실까지 겹치니, 자꾸만 탓할 게 없어 시대와 국가를 원망하게 되더군요. 뭐, 애초에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의 성향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요.
SNS 따위로 무너진 모습을 이렇게 장중한 글로 적는다는 것도 우습고, 자존심이 몹시 상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언젠가 시대와 시간이 증명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네가 누군데?”라는 질문 앞에서 쌓였던 울분을 쏟아내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그게 누구였더라?”라는 말 속에서 기억조차 흐려져 가는 게 너무 서러웠던 것 같습니다.
3. 빛과 그림자
사실 돌이켜 보면, 분명 조금 더 올라설 수 있었던 찰나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놓쳐 버린 제 잘못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부정하기 힘든 사실 중 하나겠죠.
사실 돌이켜 보면 기회를 놓쳤다기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안주하지 않았기에 눈앞에 놓였던 기회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물면서 스스로를 닦아 나갈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항상 뒤처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거죠. 어쩌면 말로만 내뱉던 “내가 최고다”, “나는 천재다”라는 겸손하지 못한 말들 뒤에는, 한순간이라도 쉬면 바로 잡아먹힐 위치에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던 불안이 숨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늘 가장자리에서 떨어질까 버티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저 자신도 알고 있었던 거죠. 스무 살 이후로 가난에 치를 떨며 안주하는 순간 도태된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무언가 새로운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까이 다가왔던 기회들을 죄다 흘려보내고, 미친 듯이 열정에만 투자해 왔던 겁니다. 이것도 결국 하나의 사업인데, 먼발치에서 보면 뻔히 보였을 선택들을 ‘열정’이라는 감투가 가리고 있었던 셈이죠. 돈을 벌기보다는, 열정만 태우고 있었던 겁니다.
10년 동안 스튜디오 하나 없이 길거리와 대관으로 충분히 잘해 오면서도, 마음 깊숙한 언저리에는 늘 서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내 실력에 비해 충분히 받지 못하고 남지 않는 촬영비용이, 늘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다수의 사진가들은 감각도, 실력도 없어 보이는데 죄다 어엿한 작업실에서 작업하며 그럴듯한 척을 하고 있는 모습도 못 견디게 싫었고요. 왜 나는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으면서도, 이렇게 길거리를 전전하며 빠듯한 벌이 속에서 카메라를 내려놓을 순간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의뢰인이라는 이름의 고객들 역시 처음엔 사진만 보고 다가왔다가도, 어느 위치에서 어디서 촬영하는지, 어떤 작업실을 얼마나 큰 규모로 가지고 있는지, 카메라는 크롭인지 풀프레임인지, 조명은 무엇을 쓰는지를 따져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게 참 개좆같았고, 동시에 너무 서러웠던 거죠.
그러다 9년째 되던 해, 여기저기서 자금을 끌어모아 거창한 작업실을 만들었습니다. 거의 10년의 한을 모조리 거기에 쏟아부었던 겁니다. 풀프레임 센서를 가진 카메라도 그때 처음 손에 쥐었습니다. 사실은 남몰래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이미 일반인 기준에서는 부족하지 않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자칭 잘나간다는 전문 사진가들이 들고 다니는 장비에 욕심이 나 새 장비를 들이는 데에만 2천만 원을 들이부었습니다.
스튜디오 공사를 끝마치던 날, 흰 벽에 프로젝터로 제가 찍어 왔던 사진들을 쏘며 혼자 감상하다가 울었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감격스러웠습니다. 이제 나도 손님을 맞이할 공간이 생겼구나. 더 이상 커피숍에서 미팅을 잡지 않아도 되는구나. 커피값이 없어, 미팅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을 서성이며 클라이언트가 먼저 도착하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어느새 나도 이 위치까지 왔구나, 그런 생각들이 차례로 밀려왔습니다.
이제는 좁은 원룸에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때로는 그 원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매번 “여기 원룸 아니에요?”, “여기서 찍어요?”, “여기 직접 주무시는 공간이죠?” 같은 민망한 말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래, 나도 이제야 제대로 된 프로 사진가의 구색을 갖췄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렸던 그 스튜디오에만 수천만 원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걸려 일궈냈다고 믿었던 그 선택의 끝은, 더 많은 빚을 축적하는 결과로 남았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국내를 벗어나 해외 사진가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할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한국은 전반적인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사진 업계의 뿌리 깊은 곳까지 허례허식과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스튜디오’란 한 사람의 작업 공간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사진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종의 ‘사진관’처럼 인식됩니다. 그 틀을 깨부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저였는데, 어느새 저 역시 그 인식에 잠식돼 있었던 거죠.
실제로 해외에는 고정된 작업실이 없는 작가들도 허다합니다. 아주 쥐콩만 한 공간만 가진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이 허영심 가득한 나라에서는 모든 명분이 결국 상대하는 대중의 허영심을 채워 주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창작가들조차 예외는 아니죠.
빚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도 저는 계속해서 새로운 투자를 시도했었습니다. 실력과 능력만 받쳐 준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사실은 조금 더 조심스럽고 예민하게 접근해야 할 장르였음에도, 오로지 제 실력만을 믿고 밀어붙였던 겁니다. 그중 하나가 해외 촬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일반 클라이언트와 함께 2박 3일, 혹은 3박 4일 일정으로 1대1 투어를 하며 해외를 배경으로 촬영하는 일이었죠.
이건 스태프 한두 명을 거느린 덩치 있는 스튜디오나 작가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 오직 저만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해외 촬영은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오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클라이언트의 기분을 살피는 배려, 대화,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조성, 언어 소통, 의상과 콘셉트, 장소 섭외, 현지 가이드, 머물 숙소, 비행 티켓, 이동 스케줄, 안전사고까지. 친한 연인이나 친구끼리도 계획하기 어려운 전반적인 모든 기획을, 처음 보는 대상과 ‘여행’과 ‘사진’이라는 매체로 엮어 시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실행하고 싶었던 가장 큰 욕심은, 한국이라는 좁고 촌스러운 배경과 공간을 벗어나 항상 갈망해 왔던 해외 사진가들의 배경지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촌스러운 공기와 공간,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죠. 물론 대부분의 대중이 문화와 예술, 창작에 개인의 열정을 투자한다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몸에 둘러도 티 나지 않는 명품 가방과 빠듯한 월급으로 벤츠를 끄는 신념만 남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기에, 왜 나가야 하는지, 나가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보다 결국 관건은 “그래서 얼마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는 것 없이 투자하는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좋은 결과물을 가져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거라고 믿었기에, 초기에는 3박 일정에 항공과 숙소, 촬영 비용을 포함해 120만 원으로 시작했고, 이후 160만 원, 최종적으로는 200만 원까지 금액을 조정했습니다. 괌을 시작으로 도쿄, 후쿠오카, 오키나와, 사이판, 대만, 홍콩, 보라카이, 보홀, 태국까지. 국내에서 네 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니며, 오로지 지속 가능한 결과물과 경험만을 바라보고 투자와 출발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해외 촬영은 늘 불가피한 변수에 노출되다 보니, 200만 원을 받아도 실제로 남는 금액은 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 나름의 요령과 노하우가 생겨 마진을 따질 수 있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정말 버거웠습니다. 피치 못한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금전적 손실은 제가 쏟아부은 열정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4. 지치다.
살아온 삶을 한 단어로 함축하자면, ‘버티기’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든 특출났고 주목받아 왔던 삶이었지만, 확고한 목표의식보다는 과했던 열정이 앞섰고, 기존에 없던 것들을 시도하며 감수해야 했던 리스크, 그리고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 환경까지 겹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버티는 게 곧 도전이 되었고, 버티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오게 된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도 다양한 경험과 그렇게도 많은 핍박과 좌절, 실패와 패배감, 절실함과 절망, 서러움 속에서도 참 긍정적으로 살아왔구나, 꽤 잘 버텨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히데의 노래 제목 ‘한계파열’처럼, 늘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그 한계를 파열하는 데서 오는 묘한 재미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존재겠죠. 밀려오는 시간을 버틸 힘은 언젠가 소진되고, 무수히 많은 한계를 파열해 왔다 해도 반복되는 한계 앞에 서게 되면 결국은 버티다 지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침의 단계는 매번 더 커지고, 지탱해 오던 무릎은 서서히 아파옵니다. 꽤 자주 다시 일어서긴 했지만, 그럴수록 마모된 관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몇 년 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서 어떤 책임감과 의지 또한 많이 꺾여 버렸습니다. 모든 예술가에게는 뮤즈가 있고, 그 뮤즈가 생명력을 지탱해 주듯, 돌아갈 자리 하나와 기댈 어깨 하나, 의지할 사람이 있었다면 부서진 무릎으로도 다시 버틸 힘이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도 예술가인 건가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뮤즈를 잃고 나니 몸도 마음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익숙해졌던 그 평온함을 잃고, 이제는 온전히 홀로 모든 걸 감당하며 발버둥 치고 있는 스스로가 안타깝게 느껴질 때도 많네요.
늘 그렇듯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이렇게 긴 글을 적었어도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앞으로의 다짐도, 어설픈 위로나 동정을 바라는 글도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나를 대변하기 위해 써 내려간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정말 지쳤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장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물론 여전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보다 너무 괴롭다거나 너무 힘들다거나 한 상태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쳐서 제로의 영역에 머무르며 무감각해진 상태’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저는 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나를 설명하고, 표현하고, 증명하며. 이렇게 저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오늘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버텼다는 증거 정도인 것 같습니다.
한 달 조금 넘게 미국에 머물며 많이 쉬었습니다. 여전히 정신만큼은 쉰 적이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비움’이라는 개념을 아주 조금은 배운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조금이라도 발전의 계기가 된다면, 무의미한 시간은 없는 거겠죠. 설령 무엇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당장 내일 죽을 게 아니라면 대단한 하루를 살지 않더라도 담담하게 시간을 받아들이며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술’, ‘예술가’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누차 말해 왔듯, 제 시작점은 애초에 변태스러운 마음이었고, 제가 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는 제가 존경하는 그들에 비하면 발끝의 때만도 못한, 조잡한 작업자에 불과합니다. 정의조차 내릴 수 없는 것을 두고,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다만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제 철학을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져가 보고 싶다는 얕은 욕구가 문득 생기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준비하려 했던 사진집이나 책 출판 같은 계획들 역시, 지금은 추진력을 모두 잃은 상태이지만요.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저는 그저 조금 지쳐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너무 오래 쉬는 바람에 기존에 촬영하신 분들의 작업이 많이 밀린 점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책임지고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시 끊임없이 작업은 이어 갈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